구성주의에서 본다면 우리는 매 순간 세계를 만들고 있다고 할 수도 있다. 영화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매 순간 영화를 만들고 있으며 동시에 그 영화를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영화보다 더 생생한 영화를 만들며 감상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시각과 청각만으로 세계를 표현할 뿐 냄새, 맛, 체감각 등 은 나타내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체감각의 오감으로 세계를 표현해 내고 있다! 바로 우리의 시각기관, 청각기관, 후각기관, 미각기관, 체감각기관이 이러한 오감을 매 순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다. 물론 나름대로 판단하고 정서적으로 느끼기까지 한다. 아름답다, 추하다,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상냥하다, 무뚝뚝하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특성들은 결코 세계 자체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우리의 마음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모양과 색, 소리, 냄새, 맛, 촉감 등은 대상 자체의 특성은 아니며, 우리의 마음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성물들은 대상의 고유한 어떤 특성을 반영한다. 그렇기 때문에 장미와 백합이 구분되고, 남자와 여자가 다르게 인식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아는 세계의 특성은 세계로부터 주어지는 원재료를 가지고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놓은 구성물이다. 원재료가 달라 구성물도 다르지만, 구성물은 결코 원재료는 아닌 것이다. 위와 같은 논의를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의 모습, 즉 우리의 시각을 통해 경험되는 세계의 특성에만 초점을 두고 좀 더 상세히 다뤄 보겠다. 우리의 보는 경험, 즉 시각은 시각자극과 이 시각자극을 받아들여 처리하는 시각기관이 온전하게 함께 갖추어져야 가능하다. 시각자극은 가시광선이라고 불리는 전자기파 에너지이다. 우리의 시각기관은 바로 이러한 에너지를 의식 경험으로 변화시키는 장치, 에너지 변환장치라고도 할 수 있다. 가시광선은 대략 400~700nm의 파장대를 갖는다. 가시광선의 파장의 차이는 우리에게 색의 차이로 경험된다. 태양의 가시광선에는 400~700nm의 모든 파장이 들어 있는데, 비 온 뒤의 무지개처럼 태양의 가시광선이 파장의 길이에 따라 일렬로 물방울 입자에 투영될 때 우리는 빨강, 주황, 노랑, 초록, 파랑, 남색, 보라의 무지갯빛을 보게 된다(빨강으로부터 보라로 갈수록 각각의 색에 해당하는 가시광선의 파장은 700nm에서 400nm로 짧아진다).
가시광선이 사물에서 반사할 때 사물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반사하여 우리의 눈에 도달한다. 장미의 꽃잎은 긴 파장을 반사하여 우리에게 붉은색으로 보이고, 장미의 나뭇잎은 중간 길이의 파장을 반사하여 우리에게 초록색으로 보인다. 물론 이 세상의 사물들이 순수하게 특정한 파장만을 반사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순수한 빨강이나 순수한 초록을 경험하는 일은 거의 없다. 이것은 아마 순수하게 특정 파장만을 제공하는 실험실 상황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따라서 일상생활에서 사물들은 각각의 특성에 따라 가시광선의 일부 파장은 흡수하고 일부 파장은 반사하며, 우리는 우리의 눈에 도달한 가시광선 파장들의 조합에 따라 매우 다양한 색을 만들어 경험하게 된다. 물론 이러한 색은 단지 우리의 눈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눈을 포함하여 눈의 망막에서 처리한 결과를 시각과 관련된 뇌의 여러 부위가 관여하여 처리한 결과 사물의 색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앞에서 시각기관이라고 할 때는 눈뿐만 아니라 시각처리에 관여하는 뇌의 부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가시광선은 태양에서 나오는 전자기파의 일부일 뿐이다. 알다시피 태양 빛에는 적외선과 자외선도 있다. 적외선은 빨강(적색), 즉 700nm보다 긴 파 장의 전자기파이고, 자외선은 보리(자색), 즉 400nm보다 짧은 파장의 전자기파이다. 우리 눈에 가시광선 이외에 적외선과 자외선도 도달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전자기파 에너지를 이용할 처리장치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물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반사되는 적외선과 자외선은 우리의 시각기관이 사물의 색을 만들 때 영향을 주지 못한다. 한편 꿀벌은 자외선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기관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햇빛에 들어 있는 전자기파 중에서 가시광선만을 사용할 줄 아는 우리가 보는 아카시아꽃과 자외선까지도 사용할 줄 아는 꿀벌이 보는 아카시아꽃은 같지 않다. 꿀벌과 우리 인간은 세계를 다르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적어도 경험적으로 우리와 꿀벌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다.
가시광선, 적외선, 자외선 등은 전자기파라는 전체 파장대의 일부이다. 전자기파는 <그림1>처럼 넓은 파장대를 갖는다. 이러한 넓은 파장대의 에너지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도달하고 있다. 바로 지금 상냥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FM 전자기파에 실려 내 곁을 지나가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듣지 못하고 있다. 동시에 재미있는 만화영화가 TV 전자기파를 타고 나에게 도달하고 있을지 모르지만 보고 듣지 못한다. 또한 수많은 무선호출기와 휴대전화의 통화가 나를 감싸고 있지만 나는 듣지 못한다. 물론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라디오, TV, 무선호출기, 휴대전화가 있으면 보고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건들은 각각의 전자기파를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에너지(소리 에너지, 가시광선 에너지)로 변환시키는 장치이다.
혹자는 색은 그렇다고 해도 사물의 모양은 사물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한다고 주장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아무리 매끄럽게 보이는 자갈돌도 자세히 보면, 혹은 현미경으로 본다면 결코 매끄러운 모양이 아니다. 또한 더 상세하게 전자현미경으로 본다면 더 이상 우리가 보는 자갈돌의 모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원자핵을 중심으로 춤추는 전자들을 보게 될 것이다. 만약 더욱 고배율의 현미경이 있어서 그것으로 본다면 또 어떤 모습일까? 아마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자갈돌의 참모습인가! 어디 자갈돌뿐이랴. 천하의 미인도 예외일 수는 없을 것이다.
혹자는 그래도 경험하지 않아도 존재하는 세계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동의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세계에 대해 우리는 결코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는 인식을 떠날 수 없다. 어떤 구성, 혹은 구성물이 다른 구성, 혹은 구성물보다 더 실재를 잘 나타내고 있다는 말도 할 수 없다. 도대체 우리의 인식을 떠나서 그 실재를 어떻게 걷어잡고 특정 구성 혹은 구성물과 비교할 수 있단 말인가! 다음으로는 우리가 얼마나 구성적으로 세계를 해석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심리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트레스의 이해와 관리-4 (0) | 2024.03.30 |
---|---|
스트레스의 이해와 관리-3 (0) | 2024.03.30 |
스트레스의 이해와 관리-1 (0) | 2024.03.25 |
심리학 이외의 범죄 관련 이론 (0) | 2024.03.15 |
범죄 수사와 심리학-연계 분석 2 (0) | 2024.03.10 |